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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아 사건, 진실규명 촉구 기획 시리즈-4

미제사건 유족들은 왜 수사기관을 ‘불신’하는가!

NGO글로벌뉴스 | 기사입력 2017/12/13 [09:36]

정경아 사건, 진실규명 촉구 기획 시리즈-4

미제사건 유족들은 왜 수사기관을 ‘불신’하는가!

NGO글로벌뉴스 | 입력 : 2017/12/13 [09:36]

 “은폐는 기본, 철옹성같은 불통체계가 초래한 것”

▲     © NGO글로벌뉴스

사람들은 대개 억울한 일이 있거나 위기상황과 마주했을 때 경찰을 찾는다. 경찰이 자신들을 위기로부터 건져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경찰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2006년에 발생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정경아 사건’도 위 사건 중 하나다.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진 정경아 양을 단순 충동적 자살로 규정한 채 내사 종결한 파주경찰서는 사망 전 외부 폭행흔적이 다분한데도 어떠한 추가수사를 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수사를 요청하는 유족들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기까지 했다. 경찰뿐만 아니었다. 사건을 담당했던 검찰, 국과수 등 사법기관들은 죄다 재수사 요청을 거절했다. 국내에는 정경아 사건과 같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미제사건이 있고 그 속에 피해자 유족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사법 불신’이라는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됐다. 이에 본지는 [정경아 사건, 진실규명 촉구 기획 시리즈]를 마치며 왜 미제사건 피해자 유족들은 ‘정의’를 강조하는 사법기관들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정경아母 “엉터리 수사가 내 인생 뺏어가”

현장조사 NO, 한눈에 척?…무조건 ‘자살’

엉터리 수사 ‘발각’에 사죄커녕 ‘은폐시도’

미제사건 대개 불통·늑장대응·은폐로 ‘점철’

 

[주간현대=성혜미 기자] 지난 2006년 발생한 정경아 사건은 2015년 현재까지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유족들은 이렇게 시간이 길어진 것은 파주경찰서의 안일한 ‘초동 대응’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처음부터 한 사인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무조건 ‘자살’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서 추락해 숨진 정경아 사건은 지금까지 10년이 다 돼 가지만 정 양을 둘러싼 죽음의 진실은 명확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정양의 유족은 수사를 담당한 파주경찰이 첫 단추를 잘 못 끼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경찰은 현장보존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상식임에도 정 양이 떨어져 있는 화단 주변과 자살추정 공간에 폴리스 라인을 두르지 않았다. 또한 동이 틀 때까지 정 양의 시신을 그 자리에 방치했다. 유족이 불만을 제기하자 사건발생 후 5일 후 폴리스라인을 설치했다.

 

두 번째로 수상한 진술서와 보고서다. 당시 정 양의 전 남자친구인 이씨는 사건 당일 정 양과 함께 있던 배씨와의 통화 중에 정양의 비명소리와 휴대폰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파주경찰은 이를 제외하고 진술서에 기록했고 이에 유족이 항의하자 이씨에게 ‘공무집행방해죄’를 운운하며 협박을 했다.

 

또한 파주경찰이 작성한 사건현장 보고서에는 정양의 지문이 자살추정장소에서 검출되지 않았다고 작성했지만 유족들에겐 지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 CCTV에서 정 양의 일행들이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거나, 두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등 수상한 행동이 찍혔지만 경찰은 이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형식적인 문답형식으로만 조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유족들이 사건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고 여러 수상한 정황들을 제시했음에도 재수사를 하려는 의지도, 명쾌한 답변도 해주지 않았다.

 

여기 정경아 사건과 같이 아주 비슷한 미제 사건이 있다. 지난 2005년 서울에서 발생한 ‘홍준희 사건’으로 경찰이 타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한 채 한 사인에만 중점을 둔 것이 특히 닮았다.

 

홍준희군은 서울대학교 대학원 컴퓨터 관련연구소에 다니던 수재다. 사건 당일 홍 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등교를 위해 집을 나섰고 홍군의 어머니는 부엌 앞 조그만 창문을 통해 아파트 입구를 보고 있었다.

 

매일 홍 군이 아파트 입구를 나서는 뒷모습을 보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은 금방 보여야 할 아들의 모습은 어째선지 5분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까치발을 들어 창문 밑을 내다봤더니 쓰러진 홍 군이 눈에 보였다. 서둘러 구조대에 신고한 어머니는 그때 당시만 해도 홍군의 모습이 너무 깨끗해 빈혈로 쓰러진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출동한 구조대원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게 된다.

 

사건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홍군의 시신을 보자마자 “자살입니다”라고 결론 지었다. 아들의 죽음으로 경황이 없던 홍군의 부모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곧바로 홍군의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화장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유족들은 홍 군의 자살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자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했듯 홍 군은 국내 최고의 명문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공학도였으며 최근 국제 프로그래밍콘테스트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이 계기로 홍 군은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또한 사망 당일은 홍군이 논문을 발표하는 날이었고 경찰 조사결과 아침 일찍 발표할 자료들을 학교 측으로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홍 군의 죽음에서도 정양 사건과 같이 외부 폭행이 의심되는 흔적이 발견됐다. 정보공개청구로 받은 홍군의 사체 사진에는 양 손톱이 피로 물들어 거의 빠져있었고 다리 전체에 걸쳐 변이 묻어 있었다.

 

이에 대해 한 법의학자는 “사진으로만 판단할 수 없지만 손톱이 이렇게 될 정도면 살려고 아파트 난관을 잡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며 “멍도 별로 없는 것을 보면 떨어진 후에도 살아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은 꼭 부검을 해야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유족들은 처음부터 자살이라고 판단내리고, 유족들에게 부검을 권하지 않은 경찰을 원망했다. 홍군의 어머니는 “경찰이 제대로 설명만이라도 해줬더라면 가슴에 묻을 수라도 있을 텐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무늘보 수사

‘정경아 사건’, ‘홍준희 사건’처럼 한 가지 사인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수사기관의 행태는 예전부터 관행처럼 이어져왔다.

 

자신의 추리가 전적으로 옳다고 여겨 수사를 연장시킨 경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어도 공소시효가 만료돼 처벌을 못한 사건도 있다.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1998년 10월17일 대구광역시 계명대학교 간호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은희양이 한밤 중 고속도로에서 덤프트럭에 부딪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정 양이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유족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정 양의 아버지는 의아했다.

 

해당 고속도로는 집의 방향과는 아주 멀고 왜 차도 없는 애가 버스도 끊긴 한밤 중에 이런 고속도로에 왔냐는 것이다.

 

또한 발견 당시 정 양은 속옷을 입지 않고 있어 성폭행 여부도 의심됐다. 며칠 후 해당 고속도로 가장자리에서 정양의 것으로 보이는 속옷도 추가적으로 발견돼 아버지는 경찰에게 국과수에 의뢰를 부탁한다고 맡겼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 국과수로 문의했더니 속옷 DNA검사 의뢰를 받은 적 없다고 말했다. 경찰이 거짓말 한 것이다.

 

당장 경찰에게 따져 물으니 “팬티가 아가씨 것이 아니라 아줌마가 입을 디자인”이라서 의뢰하지 않았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답변을 했다. 그리고 정양의 아버지에게 “야채 장사하는 놈이 뭘 안다고 증거를 요청하느냐 우리가 교통사고라고하면 교통사고인 줄 알아라”며 폭언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끈질기게 DNA검사를 요청했고 사건발생 5개월 후, 1년3개월 후 2번에 걸쳐 DNA검사를 실시했고 검사결과 해당 속옷은 정양의 것이 맞았고 남성의 정액이 발견됐다.

 

발견된 정액의 주인은 스리랑카출신 외국인 K씨였다. K씨를 검거한 검찰은 특수강도강간혐의로 그를 기소했지만 법원은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처분을 내렸다.

 

현행법상 ‘특수강도강간혐의’가 인정되려면 ‘특수강도’행위를 하는 동시에 ‘강간’이 성립되야 한다. 그러나 K씨의 경우 정액 검출로 강간혐의는 인정되지만 ‘강도’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 차선택으로 ‘강간혐의’로 재판에 세울 수 있었지만 이미 강간혐의는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증거가 명확함에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라는 결과에 유족들은 허탈해 했다.

정양의 아버지는 “초동수사에서 다양한 상황을 따져보지 않았고 피해자 가족 증언을 무시했다”며 “증거품을 제시했을 때 빨리 수사를 했더라면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 아니냐”고 분노했다.

 

정양 사건을 비롯해 미제사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피해자 가족들에게 수사기관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공개하지 않은 정보는 은폐하기도 쉬웠다.

 

미제사건의 기본은 ‘은폐’

지난 2012년 대한민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준 사건이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서 발생했다. 일명 ‘수원 토막살인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피의자인 오원춘의 잔인한 수법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녹취록을 은폐하고 각종 거짓말을 일삼았던 경찰들의 태도가 더 국민들에게 충격이 됐다.

 

지난 2012년 4월 40대 조선족 오원춘은 길을 가던 여성을 붙잡아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갔다. 오원춘은 경찰진술서 피해여성이 자신의 어깨를 먼저 부딪쳤고 욕설을 해 화가나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진술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CCTV분석결과 피해여성을 기다렸다 고의적으로 부딪친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오원춘에게 끌려간 피해자는 피의자가 한 눈을 판 뒤 방문을 잠그고 경찰에 구조요청을 했다. 그러나 경찰은 정확한 주소를 말하라며 시간을 계속 끌었고 결국 방문이 억지로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그리고 경찰은 신고전화를 받은 지 13시간 만에 피해자 여성을 잔혹하게 해체해 봉지에 나눠 담고 있는 오원춘을 검거했다.

 

피해자를 찾기 위한 13시간동안의 경찰들의 행적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경찰들은 탐문수사도 하지 않고, 사이렌을 울려 주의를 주지 않고 그 주변만 맴돌았던 것이다.

 

아울러 경찰은 피해자 음성이 담긴 1분20초짜리 일부 녹취록만을 공개하였다. 이에 유가족과 인권위가 전체 녹취록을 요구하자 다양한 방식으로 은폐를 시도하다 결국 원본 녹취록은 7분여 자료라는 것이 드러났다.

 

공개된 녹취록에는 피해자의 “아저씨 아파요”라는 비명 소리와 테이프 뜯는 소리가 담겨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 근무자들은 부부싸움이라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며 “에이, 끊어버리자”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경찰의 황당무계한 언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늦장출동이라는 비난에 사건을 담당한 형사과장은 “13시간이면 빨리 잡은 거다. 그리고 빨리 찾았어도 신고 직후 어차피 죽었을 것”이라 막말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유가족 앞에서 자신들의 동료에게 “한 건 했다”며 자축까지 했다.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의 행동에 유족들은 “경찰의 엉터리 대응으로 살 수 도 있는 아이가 처참하게 살해됐다”며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여기에 1심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오원춘에 대법원이 형량을 줄여 ‘무기징역’선고를 내린 것에 대해서도 “국가가 피해자 인권을 전혀 생각 안하고 가해자 말만 듣고 가해자 편만 들었다”며 허탈해 했다.

 

가해자위주 판결에 “한국법은 개법”

피해자 말보단 가해자 말을 더 잘 들어주는 듯 한 태도도 불신의 원인 중 하나다. 이 때문에 미제사건 피해자 유족들은 수사기관, 사법기관 불신을 넘어 사회, 국가 전체를 불신한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도 검찰이 가해자들에 과도한 편의를 제공했다고 지적받은 사건이다.

 

1997년 4월 여자친구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홍익대학교 재학생 조중필씨는 근처 햄버거 가게를 들려 화장실을 찾았다. 그 뒤를 따라 한국계 미국인 아서 존 패터슨과 에드워드 리가 들어갔다.

 

이 들 중 한 사람은 소변을 보고 있던 조 군의 등 뒤로 접근해 칼로 조군의 양쪽 목과 가슴을 무려 9차례나 무참히 찔렀다. 왼쪽 목 동맥이 절단되는 치명상을 입은 조군은 과다출혈로 그 자리에서 숨졌다.

 

조 군을 발견한 햄버거 가게 종업원은 당시 조 군의 모습을 피가 담긴 욕조에 담갔던 것처럼 피가 난자해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고 설명했다.

 

국내 수사기관과 미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CID)는 아서 존 패터슨과 에드워드 리를 용의자 선상에 뒀지만 양 측은 서로에게 범죄사실을 미뤘다.

 

첨예한 진실공방을 지켜보던 법원은 결국 에드워드 리에게 살인죄를 선고했고 패터슨에게는  증거인멸 및 흉기소지혐의에 대해서만 복역을 결정했다.

 

그러다 1998년 에드워드 리가 대법원으로 부터 무죄판결을 받고 패터슨 또한 같은 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이를 지켜보던 조군의 어머니는 “한국법은 개법이다”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유족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패터슨을 다시 검찰에게 재수사 요청을 했지만 출국금지 연장을 해놓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패터슨은 유유히 한국을 떠났다.

 

용의자가 미국으로 달아난 중대한 실수가 벌어질 때에도 검찰은 어머니에게 자신들이 출국금지 연장을 하지 않았다고 시인하기는 커녕 패터슨이 아직 한국에 있다는 거짓말까지 자행했다.

 

검찰은 당시 담당검사가 다른 사건을 처리하느라 간과했다고 해명했지만 유족들은 핑계라고 보았다. 유족은 “이틀 빈 것을 어떻게 패터슨이 알고 풀리자마자 비행기 표 끊고 갔겠냐”며 “우리정부가 도와준 거겠지”라고 정부를 불신했다.

 

이처럼 ‘이태원 살인사건’을 비롯해 ‘정경아 사건’, ‘대구 여대생 사건’, ‘홍준희 사건’, ‘수원 토막살인 사건’ 등 남은 유족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사법기관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주 인터뷰 말미에서 정양의 어머니는 “처음에 누구보다 우리나라 경찰을 신뢰했다”며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모를 줄 알고 수사를 엉터리로 진행했고 이의를 제기하자 사과할 생각은 안하고 은폐하기 급급했다”며 사법기관 불신의 원인을 지적한 바 있다.

 

ahna1013@naver.com

성혜미 기자 | 기사입력 2015/11/2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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